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앙리 마티스 (문단 편집) == 주요 작품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모자를 쓴 여인.jpg|width=100%]]}}} || ||<-2>{{{+1 '''모자를 쓴 여인'''}}}[br]{{{#!wiki style="font-family: Times, serif" ''' ''La femme au chapeau'' '''}}}|| || '''제작''' ||1905년 || || '''종류''' ||인물화 || || '''기법''' ||[[캔버스]]에 유채|| || '''크기''' ||80.65 cm × 59.69 cm|| || '''소장''' ||[include(틀:국기, 국명=미국)][br]{{{#!wiki style="letter-spacing: -0.5px;"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br](San Francisco Museum of Modern Art)}}} || ||<-2>|| 이 작품은 절제된 붓질을 보여주던 초기 작업과는 달리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을 거침없이 표현한 마티스의 변화를 잘 나타내고 있다. 부자연스러운 색상과 거친 붓질, 마치 완성 단계가 아닌 것 같은 이 작품은 당시 예술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작품의 모델은 마티스의 아내다. 참고로 마티스의 아내는 이 작품을 보고 불같이 화를 냈는데 한껏 꾸민 화사한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푸른색 계열로 거칠게 그려졌으니 많이 속상하셨을 듯. 당시 파리에 거주하고 있었던 [[샌프란시스코]] 출신의 형제 기업인 스타인 가족이 이 작품을 구입해 [[캘리포니아]]로 가져왔다. 이 스타인 가족은 마티스의 작품을 엄청 사랑하는 애호가로 눈에 보이는 대로 마티스의 작품을 수집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자식들이 [[경마]]로 재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마티스의 작품들을 리바이스 청바지 사장인 월터 하스에게 넘겼다. 그리고 1990년대 월터 하스의 아내 앨리스 하스가 37점의 회화와 조각, 판화를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에 기증하면서 현재 모자를 쓴 여인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의 소유가 되었다.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삶의 기쁨.jpg|width=100%]]}}} || ||<-2>{{{+1 '''삶의 기쁨'''}}}[br]{{{#!wiki style="font-family: Times, serif" ''' ''Le bonheur de vivre'' '''}}}|| || '''제작''' ||1906년|| || '''종류''' ||풍경화|| || '''기법''' ||[[캔버스]]에 유채|| || '''크기''' ||176.5 cm × 240.7 cm|| || '''소장''' ||[include(틀:국기, 국명=미국)][br]{{{#!wiki style="letter-spacing: -0.5px;"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 반스 재단[br](Barnes Foundation, Philadelphia)}}} || ||<-2>|| 앙리 마티스가 이 작품을 그릴 때 "내가 꿈꾸는 미술이란 정신 노동자들이 아무런 걱정, 근심없이 편안하게 머리를 누일 수 있는 안락의자 같은 작품"이라고 했다. 폭발적인 색채를 거침없이 휘둘러 마치 포악함 짐승같다는 의미로 '야수파의 화가'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지만 그의 야수파적 흥분은 오래 가지 못했고 마티스의 붓이 한결 부드러워졌을 때 '삶의 기쁨'이라는 이 작품이 나왔다. 폭발적인 색채를 지나 평온하고 안락한 분위기의 이 그림을 마티스 본인은 '정신을 위한 안락한 의자'라고 칭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1920년경 미국인 컬렉터 앨버트 반즈가 구입한 이래 반즈 재단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반즈 재단의 소장품 공개 방침은 대단히 엄격해서, 작품의 상설 전시는 물론 컬러 인쇄마저 오랫동안 금지되어 있었다. '삶의 기쁨' 역시 1993년에야 처음으로 컬러로 된 책에 등장했다. 생전의 마티스도 반즈의 방침을 지지했다고 하니 평생 못 볼 수도 있던 것이다.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앙리 마티스 춤.jpg|width=100%]]}}} || ||<-2>{{{+1 '''춤'''}}}[br]{{{#!wiki style="font-family: Times, serif" ''' ''Dance'' '''}}}|| || '''제작''' ||1910년|| || '''종류''' ||유화|| || '''기법''' ||[[캔버스]]에 유채|| || '''크기''' ||260 cm × 391 cm|| || '''소장''' ||[include(틀:국기, 국명=러시아)][br]{{{#!wiki style="letter-spacing: -0.5px;"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br](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 ||<-2>|| 이 작품은 러시아 상인이자 남작이었던 세르게 슈츄킨의 주문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슈츄킨은 본인의 저택에 장식할 그림으로 마티스에게 의뢰했다.] 슈츄킨은 마티스가 파격적인 색채와 단순한 형태를 갖추고 프랑스에 유명해지기 전까지 열렬히 후원해주던 사람이다. 이 작품을 그리면서 마티스는 "세 가지 색이면 충분하다. 하늘을 칠할 파란색, 인물을 칠할 붉은색, 그리고 동산을 칠할 초록색이면 충분하다. 사상과 섬세한 감수성을 단순화시킴으로 우리는 고요를 추구할 수 있다. 내가 추구하는 유일한 이상은 '조화'다."라고 말했다. 캔버스에 그려진 춤추는 사람들 사이에는 둥근 모양의 리드미컬한 움직임이 형성된다. 한편, 쫙 뻗은 두 사람의 손이 닿을 듯 말 듯한 지점에는 마티스가 불어넣은 역동적인 긴장감이 감돈다. 선, 색채, 형태의 혁명적 적용을 달성한 이 그림은 20세기 회화의 중요한 운동이라 할 수 있는 [[표현주의]]와 [[추상주의]]의 씨앗을 뿌리는 쾌거를 이루었다.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루마니아 풍의 블라우스를 입은 여인.jpg|width=100%]]}}} || ||<-2>{{{+1 '''루마니아 풍의 블라우스를 입은 여인'''}}}[br]{{{#!wiki style="font-family: Times, serif" ''' ''La Blouse Roumaine'' '''}}}|| || '''제작''' ||1940년|| || '''종류''' ||[[초상화]], [[유화(미술)|유화]]|| || '''기법''' ||[[캔버스]]에 유채|| || '''크기''' ||92 cm × 73 cm|| || '''소장''' ||[include(틀:국기, 국명=프랑스)][br]{{{#!wiki style="letter-spacing: -0.5px;" [[파리(프랑스)|파리]] [[퐁피두 센터]] 국립근대미술관[br](Musée national d'Art moderne, Paris)}}} || ||<-2>|| 마티스는 여인의 초상화를 여러점 남겼는데 이 그림처럼 인물을 그릴 때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보다는 색채 표현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그림에서도 머리 모양과 이목구비는 과감하게 생략하고 단순하게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입체감은 사라지고 평면적인 느낌이 강한 것이 특징. 또한 화려한 색채 표현도 두드러져 보인다. 특히 여인의 흰색 블라우스 위에 그려진 무늬는 [[아라베스크]] 문양을 연상시키는데, 아라베스크 문양은 덩굴 식물의 부드러운 곡선과 기하학적 무늬가 조화를 이룬 패턴을 말한다. 이 문양은 주로 [[이슬람]] 사원의 벽면이나 공예품에서 볼 수 있다. 젊은 시절 마티스는 [[북아프리카]] 지역을 여행하면서 아라베스크 문양의 옷감과 [[카펫]]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여인이 입고 있는 블라우스에 새겨진 무늬도 이러한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식물 모티프와 기하학적 문양이 어우러진 옷의 무늬는 밝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carus-1946.jpg|width=100%]]}}} || ||<-2>{{{+1 '''이카루스'''}}}[br]{{{#!wiki style="font-family: Times, serif" ''' ''Icare'' '''}}} || || '''제작''' ||1946년|| || '''종류''' ||[[콜라주]]|| || '''기법''' ||[[과슈]]를 칠한 [[색종이]] [[콜라주]]|| || '''크기''' ||43.4 cm × 34.1 cm|| || '''비고''' ||아트북 『재즈 {{{-2 ''Jazz''}}}』 제8번 수록 || || '''소장''' ||[include(틀:국기, 국명=영국)][br]{{{#!wiki style="letter-spacing: -0.5px;"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국립근대미술관[br](Scottish National Gallery of Modern Art, Edinburgh)}}} || ||<-2>|| 마티스는 말년에 색종이를 이용해 형태를 단순화한 작품을 여러점 남겼는데 이카루스도 그 작품 중 하나다. 말년에 마티스는 지독한 [[관절염]]으로 고생했다. 손에 붓을 쥐기조차 힘들어지자 그는 손에다 붓을 묶어서 그림을 그렸다. 나중에는 이것도 쉽지 않자 색종이를 가위로 오려서 붙이는 콜라주 작업에 몰두했다. 그리고 색종이 작업을 하면서 “가위는 연필보다 더 감각적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이런 색종이 콜라주 작품을 하나의 '조각'같다고 느낀 듯하다. [[조각가]]가 [[나무]]나 [[돌]]을 다듬고 깎듯, 종이에 과슈를 바르고 색종이를 잘라 붙이는 행위가 마치 조각의 과정과 흡사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카루스는 널리 알려졌다시피 미로에 갇힌 이카루스는 동굴을 빠져나와 깃털로 만들어진 날개를 밀랍으로 고정하여 탈출한다. 그러나 비행의 즐거움으로 과욕을 부렸고 높이 날아 태양 가까이에 간 이카루스는 결국 밀랍이 녹아 추락한다. 마티스는 이 추락하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이 작품의 파란색 배경은 하늘을, 사람의 형태를 한 검은색은 이카루스를, 가슴의 빨간 점은 동경심을 가진 인간의 심장을 표현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노란색 별 무늬는 날개의 깃털로 보인다. 한편, 이카루스로 보이는 추락하는 검은 사람은 사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사한 [[공군]] 비행사를 의미하기도 한다.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왕의 슬픔.jpg|width=100%]]}}} || ||<-2>{{{+1 '''왕의 슬픔'''}}}[br]{{{#!wiki style="font-family: Times, serif" ''' ''La Tristesse du roi'' '''}}}|| || '''제작''' ||1952년|| || '''종류''' ||[[콜라주]]|| || '''기법''' ||[[과슈]]를 칠한 [[색종이]] [[콜라주]]|| || '''크기''' ||292 cm × 386 cm|| || '''소장''' ||[include(틀:국기, 국명=프랑스)][br]{{{#!wiki style="letter-spacing: -0.5px;" [[파리(프랑스)|파리]] [[퐁피두 센터]] 국립근대미술관[br](Musée national d'Art moderne, Paris)}}} || ||<-2>|| 이 작품은 마티스가 죽기 2년 전에 제작된 작품이다. 색종이 그림의 기념비적인 대작으로 마티스의 자유분방함 색채 감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원색의 화려함과 경쾌한 단순성으로 자신의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했다. 이 작품 안에 표현된 인물은 [[렘브란트]]가 그린 '사울 앞에서 수금을 연주하는 다윗'의 수금을 켜는 다윗 왕이고 바로 마티스 자신이기도 하다. 6개의 꽃이 피어있는 검은색 옷을 입고 있는 다윗왕은 실제로도 수금 연주가 뛰어나 사울 왕의 [[광기]]마저 다스릴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웅크린 모습은 건강 악화로 휠체어의 도움을 받는 자신의 마지막 자화상이었던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